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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나무정령의 선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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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들과 선비가 되기를 원하는 자들의 모임
by 대나무정령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

한국인을 대표할 수 있는 것에는 뭐가 있을까요. 한국인 하면 떠오르고 한국인의 상징으로 여겨질만한 것이 무엇이 있을까요. 그것은 바로 선비입니다. 우리만의 고유한 문화이자 한국인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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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에 대해서 소개하겠습니다. 최초의 선비는 삼국시대에 존재했습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고구려 시대에 6대왕 태조시대에 만들어졌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입니다. 간략하게 태조왕에 대해서 설명하자면 그는 쿠데타를 일으켜서 고구려의 왕권을 잡은 인물입니다. 추몽께서 고구려를 세우신 후 5대 모본왕까지 그 피가 이어졌으나 그 후에 태조왕께서 쿠테타를 일으켜서 국조왕이 되셨지요. 최초의 선비는 그때 생겨났습니다.

선비란 지혜와 힘을 갖춘 존재입니다. 그 당시에는 선배제도라는 것이 있었습니다. 선배제도는 문무겸전의 인재들을 양성하며 그들이 유년의 어린 나이에서부터 신체발달에 부응하는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훈련과 교양을 통해 보다 완벽한 심신의 능력을 갖게 되는 하는 제도입니다. 이들은 조의선인이라고 하는데 그것은 이두문으로 선배 또는 선비라고 발음됩니다. 그러니까 뜻을 풀이하자면 검은 옷의 선비가 됩니다. 의외로 로맨틱하지 않나요? 이들은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게 인식하고 문제의 실상과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을 갖도록 훈련됩니다.

고구려 시대에 선비들의 대표적인 활약으로서는 안시성 전투가 있습니다. 당태종이 요동의 여러 성들을 함락시킨 후 많은 공성기구들로 안시성을 공격했었지만 조상님들은 이것을 훌륭하게 막아내었습니다. 그러자 당태종은 60일동안 50만명을 동원하여 성의 동남쪽에 높은 토산을 쌓게 했는데 이때 토산이 무너지며 성벽의 일부를 붕괴시켰습니다. 이때 고구려군 결사대가 일제히 돌격하여 당나라군을 물리치고 토산을 점령하고 주변을 깎아 나무를 깎고 불을 놓고 지키니 얼씬도 못했습니다. 기록은 '이때 성안에서 검은 옷을 입은 백 명의 용사가 튀어나와 천장의 거미줄을 걷어내듯 당나라 2만 기병을 산 아래로 팽개치고는 오히려 토산을 차지해 버렸다'라고 적고 있습니다. 이 검은 옷의 용사들을 조의선인이라고 부릅니다. 당시에 고구려의 조의선인은 무려 3만여 명에 달했고 그 수장은 연개소문이었다고 합니다.

선비는 사냥이나 노래와 춤 그리고 무예 등 여러가지 경기에 의해서 선발되는데 그 방법으로 대표적인 종목들은 씨름, 검무, 수박, 깨금질, 택견, 물싸움, 노래, 춤, 사냥 등이었습니다. 대부분의 것들은 아직도 전승되고 있지만 수박만은 실전되었고 대신 수박의 변질된 형태인 수벽치기가 아직 전승되고 있지요. 선비가 된 사람들은 모든 곤란과 괴로움을 이겨내고 고사(故事)를 강론하거나 학예를 익히고 산수를 탐험하고 성곽을 쌓고 길을 닦고 군중을 위해 강습을 하게됩니다. 선비들은 자기들 중 가장 선행과 학문과 기술이 뛰어난 자를 뽑아서 스승으로 섬기는데 이 스승은 신크마리라고 불리우며 마리는 대형이라는 의미가 있다고 합니다. 전쟁이 일어날 경우 신크마리가 선비들을 모아 스스로 단체를 조직하여 싸움에 참가하게 됩니다. 당시 고구려에는 골품제가 있어서 출신배경이 좋지 못한 사람들은 높은 지위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선비의 단체는 귀천이 없이 학문과 기술로 자신의 지위를 획득할 수 있었습니다.

668년에 고구려는 멸망하게 됩니다. 신라와 함께 고구려와 백제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일부의 왕족.고관.장수들을 포함하여 1만 3천여명의 백제인들과 20만여명의 (3만 8천 200호인데 한 호당 5~6으로 계산) 고구려인들을 포로로 끌고갔습니다. 이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는 69만 7천호 백제의 인구는 76만호였다고 합니다. 여기서 호는 가족을 뜻합니다. 고구려가 훨씬 더 큰데 어째서 그렇게 인구가 적었느냐하면 그 당시 고구려는 수많은 전쟁으로 인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라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입니다. 고구려 포로가 더 많은 이유는 고구려의 땅을 더 효과적으로 지배하기 위해서고요. 그런데 이때 고구려의 한 가족당 인구수를 5명으로 봐서는 안 됩니다. 왜냐하면 수십년간 전쟁을 치뤄서 많은 사람들이 죽었기 때문이지요. 한 호당 인구수를 3.3명으로 계산하면 멸망 당시 고구려의 인구수는 3만 8천 200호니까 230만 명 정도가 됩니다.

당나라로 끌려간 고구려인들은 중국 오지를 방황하며 당나라군과 싸우기도 하고 옛 고구려 땅을 찾아 떠나기도 했으며 여진족, 거란 등의 이민족들에 들어가기도 했는데 그 중 이정기라는 분이 있었습니다.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의 중심부에 나라를 세워 손자대에 이르기까지 58년간이나 버텼다고 합니다. 최초에는 고구려 유민들로 만들어진 2만명의 군대밖에 없었지만 10여만의 당나라군을 격파할 정도로 용맹했었습니다. 이 당시 많은 유민들이 계속 신라와 동부만주 그리고 돌궐로 이주해가서 요동에는 고
구려 유민이 거의 남지 않게 되었습니다. 구당서에 의하면 5718호 (1만8156명)이 남아 있었다고 하는군요. 이 돌궐은 지금의 터키입니다.

670년 4월에는 보장왕의 외손 안승과 검모잠 등이 칼을 들고 일어났고 뒤를 이어 당나라의 영주부근에 강제로 이주되어 있던 유민집단은 696년 당나라가 거란족의 반란에 혼란스러워 할 때 일부 말갈족 집단과 함께 동으로 탈주하여 동부만주에 국가를 건설하여 당나라는 고구려가 멸망되었는데도 고구려의 영토를 제대로 지배해보지도 못한 채 자신들의 나라로 쫓겨갔습니다. 또한 만주지역에 흩어져 있던 고구려유민들은 급속히 그 아래에서 뭉쳤는데 이것이 발해가 됩니다. 요동에 남아 있던 소수의 고구려유민은 안녹산의 난 이후 일시 소고구려국을 세워 자립하였으나, 곧 이어 9세기 전반 발해에 병합됩니다. 최초에 발해의 인구는 단 10여만호의 시민들과 정예군 수만 명밖에 없었다고 합니다. 하지만 점차 그 세력을 불려 전성기에는 대략 300여만명까지 많아졌습니다. 이 발해는 고구려 유민들이 고구려에게 충성하던 속말갈족에게 합류하면서 세워진 건데 신당서에 의하면 고구려 유민의 수가 말갈족의 20배가 넘었다고 합니다. 한마디로 발해는 말갈화 된 고구려 유민들과 후에 모여들은 고구려 유민들이 합쳐져서 만들어진 나라입니다.

그와 동시에 신라화된 고구려인들도 있었는데 901년에 후고구려를 건국했고 태조 왕건이 반란을 일으켜서 918년 고려가 만들어지고 거의 250년에 가까운 시간동안 단절되어온 선비는 되살아납니다. 고구려의 유민들은 고려의 이름 아래에서 뭉치게 되는데 나중에는 발해인들까지 고려로 오게 됩니다. 발해계 고구려인의 고려 합류는 200년을 넘는 오랜 세월동안 공식적으로는 크게는 4번에 걸쳐서 이루어졌습니다. 첫번째로는 발해가 멸망하기 전에 장국 신덕 등 발해의 장군 500명이 부하들과 함께 귀화했고 같은 해에 모두간 등이 백성 1000호와 함께 귀화했으며 두번째는 발해가 멸망한 후 태조 10년부터 12년까지 발해의 망국민들이 다수 고려에 합류하였습니다. 세번째로는 발해가 멸망한 후 후발해가 건국되었는데 이게 정안국으로 바뀌면서 대규모의 발해인들이 고려로 합류하였고 후발해는 중국 5대 왕조와 통교하다가 정권이 열씨(列氏)에게 넘어가게 되자 세자 대광현이 수만 명의 백성을 거느리고 합류하였습니다. 네번째로는 거란 제국의 극성기에 흥요국의 발해 재건 운동이 실패하면서 또다시 발해인들의 고려 합류가 있었습니다. 발해 왕실의 후손인 대연림은 흥요국을 일으킨 후 고려에 원병을 요청하여 거란에 대항하였으나 1년만에 붕괴했답니다. 남은 자들은 뿔뿔이 흩어지며 북방 이민족들과 몽골, 일본 등에 합류하였습니다. 간혹 발해를 우리나라 역사로 넣어야 하는지 마는지 곤란해하는 분들이 있는데 대조영이 순수 고구려인이었는지 고구려계 말갈인이었는지는 그렇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선 양쪽 다 고구려인이라고 생각해야 하는데다가 발해가 우리 역사인 이유는 우리가 발해인이기도 하기 때문이며 고구려와 고려의 후예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니까 크게 보면 우리는 말갈화 된 고구려인들과 말갈인들과 일반 고구려 유민들과 신라화 된 고구려인들과 신라화 된 백제인들과 신라인들의 후예인 것이지요. 일부 삼국시대가 아니라 고구려 시대라는 단어를 써야한다는 분들이 계시는데 일단 우리의 뿌리는 고구려인 셈입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고대 언어의 자료는 거의 없지만 박병채라는 분은 61개의 고구려어를 찾아냈는데 그 중 41개가 우리의 중세국어 (10세기부터 17세기까지의 언어)와 일치한다고 하더군요. 고구려가 워낙에 크고 방언이 많았을 것을 고려해도 꽤 우리의 언어가 (고구려어) 250년이라는 긴 세월동안 많이 변질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고려 시대의 인구 조사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습니다. 송사에는 대략 200만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멸망한 백제의 인구수보다도 적으니 말이 되지 않고 일반적으로는 대략 800만 정도라고 추측하고 있습니다. 고려 말기에는 굉장히 혼란스러웠고 전쟁도 잦았으니 그 수가 상당히 줄어들어 조선 초기에는 거의 600만명까지 줄어들었습니다.

고려시대에 선비는 다시 태어났는데 이때 재가화상이라는 존재가 있었습니다. 이들이 누구냐하면 고구려 시대 선비들의 후예입니다. 기록에 의하면:

"재가화상은 가사를 입지 않고 계율을 지키지 않으며, 흰 모시의 좁은 옷에 검정색 깁(비단) 으로 허리를 묶고 맨발로 다니는데. 간혹 신발을 신은 자도 있다. 거처할 집을 자신이 만들며 아내를 얻고 자식을 기른다. 그들은 관청에서 기물을 져 나르고 도로를 쓸고 도랑을 내고 성과 집을 수축하는 일들에 다 종사한다. 변경에 경보가 있으면 단결해서 나가는데 비록 달리는 데 익숙하지 않기는 하나 자못 씩씩하고 용감하다. 군대에 가게 되면 각자가 양식을 마련해 가기 때문에 나라의 경비를 소모하지 않고서 전쟁할 수 있게 된다. 듣기로는 중간에 글안(거란)이 고려인에게 패전한 것도 바로 이 무리들의 힘 이었다고 한다. 이족(夷簇:고려인)의 사람들은 그들이 수염과 머리를 깎아 버린 것을 가지고 화상(和尙:승려)이라고 이름한 것이다."

신채호 선생님은 이들이 선비라는 이름을 학문을 닦는 유교도들에게 빼앗겼다고 표현하셨고 저들이 학문을 익힐 여력이 되지 않아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잊고 후대에 이를 물려주지 못했다고 하셨지만 이는 반은 맞고 반은 틀린 소리입니다. 원래 선비란 피에 의해 계승되는 것이 아닙니다. 저들이 자신들이 선비라고 불린다는 것을 잊고 자신들의 사명만 기억하고 있었다는 것은 맞는 말이지만 유교도들이 선비라는 이름을 빼앗은 것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의 선비들이 유교를 학문으로서 공부한 것일뿐입니다. 원래 선비란 무와 문을 둘 다 갖춘 존재였지만 무의 힘은 잃어가고 문의 힘만 추구하게 된 거지요. 그리고 고려시대까지는 선비들이 어느정도는 무의 힘을 갖췄다고 합니다.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도 선비들은 민족을 위해 자신들의 몸을 아끼지 않았는데 임진왜란 때의 이순신, 권율, 김시민, 곽재우, 김덕령 등 여러 장군들과 그 외 크고 작은 의병들을 이끌고 왜병을 공격했던 의병장들에게서 우리는 선비정신을 볼 수 있고 특히 권율은 문과에 급제한 문관이었으나 항상 병법을 연구하고 나라안의 여러 지역들을 두루 유람하며 지형과 지세를 면밀히 살폈으며 검술에도 아주 뛰어났던 진정한 의미에서 선비였지요. 선비정신은 일제시대에 여러 독립운동가들의 독립운동에도 영향을 끼쳤는데 안중근 의사는 기마술과 사격술이 뛰어났고 김좌진 장군은 어려서부터 병법서를 즐겨 읽고 기마술과 검술을 부지런히 익혔는데 나라가 망해가자 15세에 종들을 해방시키고 재산을 모두 나누어 준 뒤 독립운동에 투신했습니다. 이렇게 조선시대에까지 선비정신은 이어집니다.

그리고 이제 21세기. 우리나라가 남북으로 분단된 지금 역시 선비정신은 이어가야 하고 신세대의 선비들이 필요합니다. 저 대나무정령이 선비관을 만든 이유는 그때문입니다. 선비정신은 한국인의 혼이고 얼입니다. 대나무 같은 올곧고 강인한 정신, 매우 정교한 지적, 정서적, 신체적 능력과 누구보다도 사물과 현상을 깊게 인식하고 문제의 실상과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며 이를 해결할 심리적, 물질적 능력. 이것이 선비의 이상적인 모습이지만 현대인으로서 진정한 선비를 추구하기는 아무래도 힘들겠지요. 그러니까 일단 올바른 정신과 지혜와 힘을 갖추는 것을 우리의 목표로 삼읍시다. 우리의 얼과 문, 무 이 세가지를 갖추는 겁니다. 나는 그렇게 할 수 없다, 나는 깨끗하지 못하다, 나는 올바르지 않다 이렇게 생각하시는 분들 역시 선비가 될 수 있습니다. 현대 사회에 찌들어 어느정도는 휘어있더라도 마음 속에 올바른 일이 올바르고 곧은 일은 곧다라는 의식을 갖추면 됩니다. 휜 대나무도 대나무입니다. 완벽한 선비의 모습을 추구하지는 않더라도 작고 소박한 선비의 모습을 추구할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완벽한 선비는 되기 힘들다고 해도 "완벽한 선비의 모습"은 우리의 가슴 속에 담아두는 일은 필요할 듯 싶습니다. 다 함께 노력해볼까요. 선비가 되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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